<그로테스크>  /  지은이 : 기리노 나쓰오  /  옮긴이 : 윤성원  /  문학사상사


아, 이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어째서인지 내 심장이 막 쿵쾅거린 책.
제목처럼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등장인물들의 인생이 어찌나 무섭든지...

62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에 빡빡한 글자수 때문에 처음 펴들기 살짝 부담스러운 책이지만,
일단 이야기의 폭풍에 쓸려들어가기 시작하면, 묵직한 분량이 무색하게 책장이 훌훌 넘어간다.
휴일인 어제 무심코 집어들었다가 결국 하루종일 빠져서 다 읽어버렸다는...^^;;;

1997년 일본 전역을 들끓게 한 '동경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냉혹한 병든 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네 여성의 이야기를
다각적 시선으로 들여다봄으로써, 현대 여성이 처한 상황을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작'
이라는 소개문구가 있다.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보다 불행한 인간을 생각하면 된다."   p492


스위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인 '나'에게는
괴물같은 미모를 소유한 1살 아래의 여동생 유리코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동생과 달리 전혀 예쁘지 않고,
어려서부터 숱하게 동생과 비교를 당해온 '나'는 동생이라는 존재가 지긋지긋하다.
동생과 떨어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동생이 들어올 수 없는 명문고에 입학하지만,
동생은 미모의 덕을 받아 간단히 따라 들어온다.

어찌어찌 세월이 흘러 '나'가 마흔이 다 되어가는 어느날,
학창시절부터 매춘을 해왔던 동생이 매춘 중에 손님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다음 해에는, 고교시절 같은 반이었던 가즈에가 역시 매춘 중에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다.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 장제중이 두 건의 살인용의자로 지목된다.


"나와 관계한 남자들은 누구나 다 뭔가를 상실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때였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새로운 남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내가 창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p157


'나'의 이야기 속에 '유리코의 수기', 살인용의자인 '장제중의 진술서',
'가즈에의 일기'가 차례로 등장해서 이들의 삶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이야기가 각자의 시점으로 이동하면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반전이 여러번 등장한다.


우선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나'가 화자이기 때문에
살해당한 유리코와 가즈에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기를 보여줄 거라 믿게 되지만,
읽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그녀 역시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동생의 미모에 지독한 열등감을 가지고 비뚤어진 괴물일 뿐...


"햇빛이 모자라서 광합성을 하지 못하면, 그 식물은 말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솎아지는 운명에 처하고 싶지 않으면, 빛을 차단하는 키 큰 식물을 쓰러뜨리거나,
광합성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무언가로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234


'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저 건방지고 생각없는 대상으로만 묘사되던 유리코도
실은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음을...


"나에게 생존이란 남자와 어떻게 싸워나가느냐는 것이었다."   p152


고교시절 일종의 왕따였던 눈치없고 얌통머리없어 보이던 가즈에는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으며 분투하고 있었을 뿐이며,
끝내는 그 인생에 좌절하고 완전히 망가져 버린 것임을...


"노력? 노력은 아무리 해도 한계라는 것이 있어. 왜냐하면 너는 천재가 아니니까.
노력한 것만큼 닳아서 무지러지는 삶도 있는 거야."  
p224


그리고 살인용의자인 장제중의 기막힌 진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즈에의 매춘일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그녀는 37살의 나이로 아가씨 소개방에서 출장매춘일을 하다가,
그마저도 떨려나서 결국 거리의 매춘부가 되고,
나중에는 단돈 몇천엔에도 매춘을 하고, 공터나 건물 옥상 등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이기도 한 그녀는 육체의 타락과 함께 점차 정신도 황폐해지고,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의 몸값이 싸지는 것과 비례해서,
그녀의 몸을 사는 남자들의 수준 또한 끔찍해진다.


"나는 지독한 손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떨면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알몸이 되어서 침대 위에 위태롭게 섰다.
에구치가 명령했다.

"거기서 대변을 봐"

나는 귀를 의심했다."
   p518


주인공들 뿐만이 아니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나'의 엄마라든가,
일흔이 다 되어보이는 나이에도 거리에서 매춘을 하는 '말보로 할머니'라든가,
암튼 '기리노 나쓰오'가 묘사하는 여성들의 인생은 이번에도 역시 처절하고, 처절한만큼 강렬하다.
어지간한 호러소설은 상대가 되지 않을만큼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이 부족하고, 삐뚤어지고, 고집스럽고, 눈치없고, 상처입은 여자들의
무서운 인생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가련하다.

책을 덮고 나니, 묵직한 책 무게만큼의 무언가가 마음 한 구석에 박혀버린 느낌이다. ㅠㅠ



* '기리노 나쓰오'의 책 자세히 보기!!!







~~ 추천과 댓글은 블로거에게 큰 격려가 된답니다^^* ~~

Posted by 블랑블랑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가리 2010.11.01 1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책 얼마전에 샀어요
    여성 하드보일드 작가니 어쩌니 하면서 평은 좋은데,,
    표지가 선뜻 손이 안가더군요^^;
    직장 동료(남)가 여자들 심리를 잘 표현했다해서 사본거거든요
    무지막지한 두께와 글씨...@_@
    잼있을까요...그렇겠..죠?

    • 블랑블랑 2010.11.02 1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이거 전 잼있었어요~
      앞부분 살짝 지루할 수도 있는데 뒤로 갈수록 엄청 쇼킹해져요..^^;;;
      일반적인 여자들 심리를 표현했다고 하긴 좀 그렇고,
      암튼 엽기적이고 슬픈 여자들 이야기에요.ㅋ
      '기리노 나쓰오' 소설 중에서는 이거랑 <아웃>이 최고죠~^^


Statistics Graph

최근에 달린 댓글

달력

 « |  » 2019.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