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사놓은 게 대체 언제인지...
'눈먼 자들의 도시'랑 함께 구입해서 이 책만 이제껏 읽지 못 하고 있었다.
연결되는 내용이라고 해서 함께 읽으려고 했던 것인데
한숨에 술술 읽힌 전작과는 달리, 어째 이 '눈뜬 자들의 도시'는 당췌 읽히지가 않았다.
읽으려고 맘 먹고 책을 폈다가도 몇페이지 읽고는 덮게 되고 마는...^^;;;




전작과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했던 나에게는 완전히 달라진 그 분위기도 낯설었거니와,
큰 움직임없이 작가의 첨언들과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중심이 되는 이 작품의 특성상
'주제 사라마구'의 특징인, 쉼표와 마침표를 제외한 모든 문장부호를 생략한 거라든가,
문단을 거의 나누지 않고 여백없이 빽빽하게 이어나간 일종의 통문장 형식이
도입부에서부터 어쩔 수 없는 난독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그러던 것을 어제 드디어 굳게 마음 먹고 읽기 시작해서 다 읽었다. 만세!ㅋ

사실 앞부분의 혼란스러움과 지루함을 잠깐만 견디면 이 정신없는 문장도 금방 익숙해진다.
그 기본은 한 사람의 이어지는 모든 대사는 오로지 쉼표로만 구분된다는 것인데
즉, 마침표가 찍힌 다음에 나오는 대사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요것만 적응되면 난독증은 사라지고,
오히려 장황한 서술 없이 스피디하게 이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대화에 푹 빠지게 된다.
암튼 이 재밌는 것을 그동안 왜 그렇게 버벅대며 읽지 못 했는지...^^;;;




내용은 알려진 바대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두 눈을 뜨고 4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다.
전작에서 도시의 시민들에게 맞춰져있던 포커스는 이번에는 권력의 중앙부로 들어간다.
선거에서 80%의 엄청난 시민들이 백지표를 던진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여
정부는 이것을 국가에 대한 전복행위로 분류하고 그에 이런저런 대응을 시작한다.
그러다 당황한 정부는 급기야 도시에 계엄령을 내리고
이어서 도시의 모든 정치조직과 경찰조직 등을 철수시키고 도시를 막아버린다.
시민들이 엄청난 혼란과 분열 속에서 스스로의 죄(?)를 참회할 수 있도록...ㅋ
그 과정 속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통찰하는지 엿볼 수 있다.


"사람을 분류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어리석은 자와 영리한 자로 나누는 게 아니야.
영리한 자와 지나치게 영리한 자로 나누는 거지.
어리석은 자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영리한 자는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지.
하지만 지나치게 영리한 자는 우리 편에 있어도 여전히 기본적으로 위험해."


전작의 주요인물들은 이야기가 한참 진행된 중반쯤부터 등장한다.
권력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희생양을 원하고,
슬프게도 개인들은 권력의 폭력을 도저히 피할 힘이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선고가 내려진 사건들도 있다는 뜻이오."




그야말로 책 뒤에 있는 문구처럼 "권력의 우매함과 잔인함을 풍자한" 한편의 "블랙유머"다.
실은 무섭고 끔찍한 음모들의 기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개가 왠지 아주 우습다.
장관들의 치고 받는 대사들도 일품이고, 단순한 서술문장 하나하나에도
'주제 사라마구'의 재치와 유머가 잔뜩 들어있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깨워도 크게 화를 내지 않을 만한 사람은 모조리 깨우기 시작했다."

"공화국 대통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가 의자 등받이에 무심코 남겨두고 간 낡은 걸레같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몇 단계 승진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장의 변기에 오줌을 누다니."

"경찰관들은 이런 것들을 다 안다. 유치원에서 배운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었던' 전작의 인물들과 달리,
'볼 수 있지만 보지 않으려는' 인물들을 내세워서
공포물인지 개그물인지 모를 분위기로 이 엄청난 비극을 담백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눈을 뜨는'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는 실로 감동적이며
우리가 과연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온다.


"내가 한 말은 우리가 사 년 전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쩌면 지금도 눈이 먼 것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 '주제 사라마구'의 책 자세히 보기!





Posted by 블랑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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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자 2010.02.23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ㅜㅜ 저도 사자마자 폈는데 펴자마자 덮고 ㅠㅠㅠㅠㅠ
    그래서 오늘 다시 읽었는데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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