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이라는 긴 제목의 이 소설은 사실 예전에도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이 제목이 아니라 '종말전 10억년'이었는데 갠적으로는 그때 제목이 더 간결하고 맘에 든다.

암튼 그때 내가 어린 나이였던지라 작품의 숨은 뜻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나름 굉장히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읽어보게 되었는데 역시 독특한 작품이다.

 

일단 장르가 SF인데, SF 하면 떠오르는

미래도시나 외계인, 우주선, 로봇, 눈부신 과학기술 등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현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SF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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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아파트 안이라는 지극히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모두 이루어진다.
주인공 밀랴노프는 과학자로, 오랫동안 연구해온 중요한 문제가 이제 막 풀리려고 하는데
때마침 계속해서 기묘한 일들을 겪게 된다.
잇따라 울리는 잘못 걸리는 전화로 인해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게 된다거나
아내의 친구라며 미모의 여성이 집에 들이닥치기도 하고,
급기에 옆집에 사는 과학자 한명이 자살했는데 그 범인으로 몰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같은 과학자인 친구 몇명이 비슷한 일을 당하고 있으며
이것이 자신들의 연구를 중단시키기 위한 압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은 다름이 아니고 이 항상성 우주가
인류의 4차원화되려는 이성을 저지하기 위해 반응을 보인 거라 할 수 있어.
우주가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거지. (.......)
모든 일은 너와 글루호프의 연구가 10억년쯤 후에 수백만의 다른 연구와 결합되어
마침내 지구의 종말을 유도해 내는 일이 없도록 진행될 거야."



이들에게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은 점점 가족의 신변까지 위협해오고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이 은근하면서도 아주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실제로 이 작품을 쓴 스뜨루가츠끼 형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광을 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발행부수가 줄어들고, 호평을 하던 비평가들이 혹평을 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독자들에게서 멀어지고 잊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작품 속에 등장한 비밀스런 압력을 그대로 체험한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철저하게 혼자서 파멸할 운명이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삶으로부터 제외되었을 때 사람들은 놀라며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그리고 곧 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작품들이 주로 당시의 소련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했기 때문인데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만을 보자면 이것이 어디 특정국가에만 국한된 일이겠는가.
저항할 힘이 없어 입 다물고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일은
국가를 넘어서 어떤 조직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까...

"탱크가 너를 향해 굴러올 때 네게 있는 유일한 무기가 네 대가리 하나라면
얼른 비켜나야 되는 것쯤은 알아야 되지 않겠냐 이거야."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둘씩 미지의 압력에 굴복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양심을 버린다는 사실에 학자로써 수치심을 느끼지만
자신의 선택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급기야 주인공마저, 홀로 남는 베체로프스끼에게 자신의 짐을 맡기고 미지의 힘에 굴복한다.
그가 베체로프스끼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선택과 고뇌에 공감할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깝다.

"나는 그 순간부터 베체로프스끼와 나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저주와 형벌의 선이 그어졌음을 가슴이 아프도록 선명하게 깨달았다.
나의 남은 생애 동안 나는 그 선의 이편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동안 베체로프스끼는 내가 알 도리 없는 전장의 총탄 속을 헤매다가
화염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암튼 멋모르고 읽었던 어린 시절의 내 기억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인데
의외로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깝다.
굉장히 씁쓸하고 어쩐지 서글퍼지기도 하는 이야기이지만
모두의 짐을 떠안고 홀로 떠나는 베체로프스끼는 마지막에 희망의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의 세월이 있어.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10억년 동안 많은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어."


Posted by 블랑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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